· · 에세이

양배추의 눈물

우울이 찾아왔다.
우울이 찾아와서 퇴사를 결심했고,
해결할 수 없는 문제를 마주했을 때도 찾아왔던 녀석이 또 왔다.

어딘가에 저당잡힌 시간이 없어서 더 편하게 펑펑 울었다.
조금씩 공부시간을 늘리고 있었는데,
시간이 가장 많은 화요일이었는데도 공부를 오래 못 했고
매주 만나던 원격 스터디 모임에도 참석하지 않았다.
대신 약간 삐져있던 현지언니한테도 먼저 연락하고,
때마침 수다 떨던 치은님에게도 내 우울을 털어놓았다.
그날따라 아침부터 할머니가 맛있는 거 먹으라며 갑작스런 용돈을 줬고,
마침 저녁에는 엄마한테 전화가 와서 다행이었다.
주변인의 목소리를 들으니 좋았다.

자기 전 일기를 쓰고 나니 더 눈물이 나서 감정이 살짝 해소되었다.
우울하면 뇌의 기능이 저하된다는 글을 본적이 있는데,
실제로 뇌가 너무 피곤해해서 강의는 짧게 듣다가 일찍 잠에 들었다.

새벽에 눈이 떠졌다.
시계를 보니 새벽 4시 반이어서 열심히 다시 잠에 들었다.
여느 때 처럼 다시 새벽 여섯 시에 일어나서
모카포트에 커피를 끓여 먹었고,
짧은 강의를 들으며 하루를 시작했다.
샤워를 살짝 더 길게 하니까 도파민이 나온 탓인지 기분이 역시 살짝 나아졌다.

우울할 때는 일기를 쓰고,
해야하는 일을 좀 대충해도 살짝 봐 주고,
샤워도 평소보다 길게 하고,
고기도 챙겨먹으면 좋다.

예전에 누가 알려준 팁이었는데, 감정에 집중하지 말고 그냥 나한테 좋은 거 (예를 들면 캐모마일 티 먹기) 같은 하는 행위를 하라고 했었다. 그래서 그렇게 했다.

우울한 나와 대화하면서 알게 된 건
내가 생각보다 더 강박적인 면이 있다는 거다.
인정욕구가 강해서인지 뭔가를 못하는 나를 참을 수가 없었다.
해결할 수 없는 문제를 만나면 우는 로봇 같기도 했다.
한편으로 나는 왜 이 모양이고 바보같은 선택을 했을까 하는 자괴감과 함께 외로움이 찾아오기도 했다.

남해 판타지가 깨져서 힘든 거 같다는 친구의 진단에
스스로가 좀 얼렁뚱땅일 때도 슬쩍 봐주고
그냥 풍경을 보려고 앉아있을 수 있는 여유있는 사람이 되라는 처방전을 받았다. 기대하고 퍼주는 건 니 마음이지만 상처받지만 않으면 된다는 가드레일도 함께였다.

서예 수업에 가서 마음에 드는 글자들도 썼다.
그 의미에 대해 깊게 생각하며 한 획씩 힘을 줄 수 있어서 좋다.

나 아(我), 즐거울 락(樂), 일어날 기(起), 편안할 녕(寧)
나 아(我), 즐거울 락(樂), 일어날 기(起), 편안할 녕(寧)

저녁에는 오랜만에 좋아하는 영상을 봤다.
내가 조세호의 팬이 되게 한 영상들이다.
https://www.youtube.com/watch?v=YVGkEvhbQDA

죽도록 노력해서 30kg를 뺐는데도, 스스로가 아쉬운 그 마음이 깊게 공감이 간다. 그럼에도 예뻐 보이려고 노력한다는 게 감동이다.
최선을 다했는데도 마음에 안드는 나를 마주하면서 더 나은 나를 바라는 건 정말 어려운 일이다. 쿨한 척 할 수도 있고, 모르는 척 할 수도 있는데 솔직하게 자신을 인정하고 이야기하는 게 너무 예뻐 보인다.
(패널들로 나온 연예인들이 이 마음을 다 이해하는 거 같지는 않다. 역시 잘난 사람들은 살짝 재수없다.)

https://www.youtube.com/watch?v=CH9glxdKgWg
이건 위의 영상을 보고 나서 같이 보면 더 감동인데,
사랑에 대해 진심으로 감사한 게 뭔지 아는 사람 같아서 좋았다.

우울이가 똑 떨어져서 갈 것 같진 않고, 한동안 나를 좀 따라다닐 것 같다.
속상한 나를 두고 그래도 괜찮다고 해야할지, 그러니까 계속 노력하자고 해야할지, 외로운 내 주변에 사랑이 없는건지 느껴지지 않는지 모르지만
나는 계속 나랑 살아야해서 한동안 나를 좀 돌봐줘야할 것 같긴 하다.

일정표대로 공부 하려고 일주일 먼저 시작해서 쌓아둔 세이브 일정이 다 떨어졌다. 그것도 걱정이지만, 입시할 때보다는 덜 냉정하게 그냥 살짝 봐주기로 한다.

그래도 카페 알바를 핑계 삼아서 시험에 도전할 용기를 낸 게 마음에 든달까. 대입까지 하고 나서 시험 따위 이제 쳐다보기도 싫다고 마음 먹었었는데, 10년 넘게 지나니까 감정평가사는 되고 싶고, 도전하고 떨어지는 상상만 해도 싫어서 마음 먹지도 못했다.
내가 왜 남해에 있는지 나도 모르고, 이 3개월이 언제 어떻게 끝날지도 모르지만, 강박적인 로봇이 얼렁뚱땅이가 되던지, 공부가 찹찹 잘 되던지 둘 중 하나만 내게 남아도 참 좋을 것 같다.

우울이랑 그럭저럭 공존할 수 있어야 할텐데 말이야. 자기효능감이 너무 강해도 좋지 않은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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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wo selves, one doma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