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에세이
퇴사를 앞두고 직접 대화한 분들도 계시고 그렇게 인사하지 못한 분들도 계십니다. 감사했던 시간들에 비해 인사드리지 못한 게 아쉬운 마음인데요. 부끄럽지만 마음을 담아서 편지를 올립니다.
1. 내게 자비스앤빌런즈는 어떤 회사 였는지.
어언 7년 동안 퇴사없이 일해왔습니다. 스무디라는 스타트업에서 현근, 혜빈, 태웅, 형수, 윌슨과 함께 일했고 고용승계의 형태로 뜻하지 않게 만나게 된 게 자비스앤빌런즈입니다. 디자이너로 2년 살짝 안되는 기간을 일하다가 21년 8월 자비스에는 데이터 분석가로 들어오게 되었었어요. 당시의 삼쩜삼은 이제 막 성공을 맛보기 시작한 50명도 안되는 작고 단단한 조직이었어요. 삼쩜삼의 앰플리튜드 로그를 설계하고 Amplitude A/B 테스트 툴을 셋팅하고 3대장이라고 불리는 전사 지표 - 조회율/대상자율/결제율를 정의하는 게 제 첫번째 업무였습니다. 그렇게 21년도에는 Growth 스쿼드를 만들고, PMF를 막 찾은 삼쩜삼은 개선하는 일들을 했었는데요. 성과도 잘 나오고 워케이션이라는 신기한 제도가 있는 이 회사에 와서 정말 즐겁게 지냈던 생각이 납니다.
민족의 정체성은 민족이 어떻게 시작되었는지, 어떤 위대한 일을 해냈는지로 정해진다고 합니다. 튀르키예는 1500년 전 세워진 돌궐족의 첫 나라 유연의 건국기념일을 축하했다고 합니다. 튀르키예랑 동북아시아아에 있는 수백년전의 나라가 무슨 상관인지 처음 들었을 때는 낯설었지만, 단군 할아버지에서 뿌리를 찾는 우리랑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단군 할아버지 터잡은 요동지방이 어딘지, 광개토대왕이 만주를 어디까지 정벌했는지 모르겠지만, 또 그게 저랑 무슨 상관인지는 모르겠지만 우리는 뿌리를 따라 의미를 찾고는 합니다. 역사란 피상적일 뿐이지만 인간은 그렇습니다.
디자이너, 데이터 분석가 뒤에도 저는 신사업 개발, 제품 전략, PM, AI 빌더 4가지 직군을 더 경험했고 몇번 더 그로스 조직을 셋팅했습니다. 스무디가 있었기에 자비스에 올 수 있었고, 처음 Growth 스쿼드가 있었기에 그 뒤의 모든 일들을 해낼 수 있었습니다. 회사를 떠나는 입장이지만 자비스앤빌런즈는 제 안에도 오래 남아 큰 의미로 남을 것 같습니다. 처음 사회로 나와, 어떤 멋진 일들을 해냈고 하는 제 정체성이기도 하고 20대에 치열하게 일했던 추억으로 남을 듯 합니다. 어떻게 보면 전 자비스무디(?) 민족인 셈인거죠.
2. 새로운 시작을 결심하게 된 이유
올해 봄 아파트에서 가지치기를 했습니다. 잘린 나무들을 발견하고 굉장히 놀랐던 기억이 납니다. 초록이 사라져 을씨년스러워진 분위기가 느껴지다 못해, 나무에게 너무 잔인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원래의 줄기 모양까지 기억은 나지 않지만, 푸르름이 아름답던 굵은 줄기들도, 작은 가지들도 가차없이 잘려나갔습니다. 집에 와서 엄마에게 말하니 그래야 새 잎이 더 잘자란다는 대답을 들었습니다. 정신없이 4, 5월이 지났습니다. 아침 수영을 다녀오며 문득 달라진 나무를 발견했습니다. 고작 두달 지났을 뿐인데, 벌써 잎이 가득한 것이 인상 깊었습니다.
삶의 방식을 바꿔보고 싶은 제게도 가지치기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어 제가 나무라면 어떨까 하는 상상이 시작 되었습니다. 저는 수많은 취미와 관심사로 이뤄진 잔가지가 많은 나무인데, 가장 굵은 가지는 회사였습니다. 시간도 가장 많이 보내고 여러 사람을 저와 이어주기도 합니다. 또 뿌리나 아주 아래에 있는 기둥은 가족일거고, 학창 시절이 그 위로 자라서 이제는 잘라낼 수 없는 과거를 담당할 것입니다.
가지치기를 해야만 새 잎과 가지가 잘 돋아나듯, 새로운 시작을 위해서는 회사를 가지치기하는 과정은 꼭 필요했습니다. 잠시 쉬고, 이것저것 하다보면 또 새로운 가능성이 생기겠지요. 두달 사이에 동네 나무들이 다시 푸르러졌듯, 뭘 하든 어떻게 되도 결국 괜찮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래서 뭐할지 궁금하실 것 같은데, 서비스 개발/이직/시험 등의 후보가 있고 여러가지 후보들 사이에서 마음이 콩닥콩닥하는 쪽으로 그때의 제가 고르지 않을까 싶습니다. 쉬면서 이것저것 해보고 너무 재밌을 것 같아요 >< 게임이라면 세이브포인트로 찍고 3번 살고 싶은 생각도 들지만 목숨은 하나니까 사는 건 더 쫄깃하고 재밌는 듯 합니다.
3. 마지막 인사
박준 작가의 운다고 달라지는 일은 아무것도 없겠지만은 이라는 산문집을 좋아합니다. 아래는 그 중 일부를 발췌한 내용입니다.
먼저 죽은 이들의 말이 아니더라도 나는 기억해두고 있는 말이 많다. "다음 만날 때에는 네가 좋아하는 종로에서 보자"라는 말은 분당의 어느 거리에서 헤어진 오래전 애인의 말이었고 "요즘 충무로에는 영화가 없어"는 이제는 연이 다해 자연스레 멀어진 전 직장 동료의 마지막 말이었다.
이제 나는 그들을 만나지 않을 것이고 혹 거리에서 스친다고 하더라도 아마 짧은 눈빛으로 인사 정도를 하며 멀어질 것이다. 그러니 이 말들 역시 그들의 유언이 된 셈이다.
역으로 나는 타인에게 별생각 없이 건넨 말이 내가 그들에게 남긴 유언이 될 수 있다고 믿는다. 그래서 같은 말이라도 조금 따뜻하고 예쁘게 하려 노력하는 편이다.
— 박준, 『운다고 달라지는 일은 아무것도 없겠지만』
이 책과 더불어 몇번의 깨달음 뒤에는 마지막 인사는 신경 써서 내 방식대로 마음에 있는 말을 다 하자는 다짐을 했었네요. 한동안 회사에 퇴사공지가 올라오지 않을 때에도 작년 피플팀 리드분께도 이 책 이야기 하며 퇴사자분들과 인사할 기회를 달라고 했던 기억이 납니다.
마지막을 잘 보내고 싶어서 두서없이 쓴 편지인데요. 그동안 자비스앤빌런즈에서 여러분들과 같이 회사에서 머리 맞대고 함께 일할 기회가 있었다는 것에 진심으로 감사드려요. 떠난다는 아쉬움도 있지만, 회사에서 해보고 싶은 걸 해볼 수 있는대로 다 해본 것 같아서 어쩐지 졸업하는 기쁨도 있네요. 한 분 한 분 개인적으로 인사드리고 싶은 마음도 있긴 했지만, 시간을 가졌어도 아쉬운 마음은 남을테니 이렇게 편지를 쓸 수 있다는 것에 감사합니다.
빌런즈 분들의 모든 하루가 즐거울 수는 없겠지만, 업무에서도 보람된 결과가 있기를 응원할게요. 또 각 개인의 삶도 무탈하고 소소한 행복이 지속되셨으면 좋겠어요. 저도 멀리서 응원하며 이곳에서의 시간을 자부심으로 간직하겠습니다. 그동안 감사했습니다.